이 곡은 지난해 1년 내내 저를 괴롭혔던 큰 숙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곡에 대한 저의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학생 시절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좀 심도있게 감상해보고자 꼬깃꼬깃 용돈을 모아 성음사에서 나오는 도이치 그라모폰 노란딱지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 샀더랬습니다. 피아니스트 베르너 하스의 연주였는데, A면과 B면 중반까지 무언가 중 유명한 곡들이 열 몇개 발췌되어 녹음이 되어있었는데, B면 맨 뒤에는 무언가 시리즈가 아닌 ‘엄격변주곡’이란 곡이 실려 있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니 저는 어느새 그 변주곡 만을 무한정 리와인드(REW)해서 연속 듣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들도 좋았지만 그 곡들과는 일단 기교적 스케일이 비교가 안되는 비루투오소적인 대곡이었고, 뭔가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을 본능적으로 흥분시키는 집요함, 지금 생각 해보니 낭만주의에서 지향하던 그 폭발적 웅대함의 이상향, 그리고 지금껏 경험해봤던 피상적인 변주곡들(은파, 소녀의 기도 류)과는 비교도 안돼는 성격적 변주의 깊이, 뭐 그런 것들을 그 당시에는 뭐라 일컫는지도 모른 채 필터없이 체내로 막 흡수되었었던 기억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음악을 들으며 살고 있지만 그때처럼 제가 스폰지 같지는 않다는 느낌입니다. 나이를 먹었으니 어쩔 수 없죠.
좌우간 그때 이래 이 변주곡은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 놈의 버킷리스트가 30여년이 지난 지난해 비로소 녹음으로 남았습니다. 악보 뒤 해설서에 나온 표현처럼 이 곡은 프로페셔널 연주자들의 출발점으로 삼을만한 전문가용 레퍼토리이지, 저 같은 아마추어가 함부로 건드릴 레퍼토리는 아닌 것입니다. 정말이지 연습하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 곡은 멘델스존의 피아노 작품군뿐만 아니라 그의 전 작품군에서도 대표작으로 뽑히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 멘델스존의 각별한 노력은 그가 이 변주곡을 완성시키기기 위해 현재 버전의 17개의 변주 외에도 변주곡 몇 개를 더 써놨다는 점에서 중명됩니다(유튜브를 막 뒤지다 보니 그 버려진 변주곡들을 연주한 녹음까지도 있더군요. 참 좋은 세상입니다). 즉 완성도와 밀도를 높이기 위해 막판에 몇 개의 변주곡을 빼버릴 각오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멘델스존 피아노 음악의 특성, 즉 화려한 기교적 경묘함과 순식간에 일제히 허무하게 떨어져 버리는 벗꽃잎 같은 무상함같은 특성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된 대작이자 고전파와 낭만주의 사이에 놓인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다리 같기도 합니다. 각각의 변주 아이디어들도 진짜 다채롭고 그 순서배열도 기가 막히며, 마지막에 폭발하는 공포스럽기까지 한 이른바 ‘마녀들의 잔치’ 변주에서 보여주는 흥분은 정말이지 낭만주의가 지향했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주 급하게 세 개의 조용한 코드로 황망히 마무리 지어버리는 최후의 순간은 멘델스존이 인류사에 길이 기억될 천재임에 틀림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제목에 대한 시비: ‘엄격’이 아닌 ‘신중’한 변주곡
Sérieuses는 프랑스어로 영어의 serious에 해당하는 뜻의 여성복수형 형용사입니다. 즉 정확한 뜻은 ‘신중한’, ‘심각한’이란 뜻이지 ‘엄격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영어에서 ‘엄격하다’가 severe인것 처럼 불어에서도 ‘엄격하다’라는 의미를 쓸 거 였으면 Variations Sévères’이었을 것입니다. 추측컨데 일본에서 잘못 번역되어 출판된 악보를 우리나라에서 라이센스로 직수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경우는 사실 생각보다 많습니다. ‘라 트라비아타’를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뜻의 ‘춘희’라고 의역한 일본의 것을 그대로 우리가 직수입한 것도 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이 잘못된 제목을 가지고 참 헛다리 추측들을 많이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낭만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형식은 고전파의 엄격함을 유지했기 때문에 ‘엄격변주곡’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라는 둥, 베토벤의 변주곡을 리스펙하는 편집악보집에 초판 되었기 때문에 그 선배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깍듯하게 표하기 위해 그렇게 명명했다는 둥 틀린 해석을 100년 넘게 한 것입니다. 낭만적인 내용을 고전파의 견고한 틀 안에 담은 작품은 멘델스존의 다른 작품들도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것만 따로 떼어 ‘엄격’하다고 형용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베토벤의 걸작 변주곡을 오마주한 것은 맞지만 그걸 ‘엄격’하다고 명명할 이유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멘델스존은 왜 이 변주곡에 ‘심각한’ 혹은 ‘신중한’이란 표제를 붙였을까요? 제 뇌피셜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건 주제가 가지는 어둡고 묵직한 단조적 분위기 때문일 것일라는 것입니다. 이게 베토벤의 작품이면 이걸 ‘심각’하다고 표현할 것도 없지만, 멘델스존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틀립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분위기를 기억해보시면 아실겁니다. 멘델스존은 천성적으로 밝은 톤의 곡을 쓰는 사람으로서 심지어 곡을 단조로 쓰더라도 이렇게까지 어두운 색채를 띄는 법이 잘 없습니다. 대부분 낙천적이고 경묘한 색채감으로 가득찬 그의 작품군에서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변주곡의 주제는 자기 작품치고는 되게 ‘심각’한, 그야말로 ‘시리어스’한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멘델스존 본인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을 표현하길 ‘D단조이며 언짢은듯’하다고 표현한 대목이 제 추측을 뒷받침합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음악애호가 여러분들께서는 이 곡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는 순간이 있다면, 이 곡의 제목은 ‘신중한 변주곡’이 맞는 번역이라는 이야기를 설파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이 곡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의 부탁 말씀입니다. 바리아씨옹 쎄리외즈~ 신중한 변주곡입니다. 어설픈 아마추어의 연주지만 버킷리스트로 삼았을 만큼 애정이 담긴 연주이니 한번 참고 들어 주시길 바래봅니다.